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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5. 15世 〉10. <부정공>증동몽교관조봉대부죽헌공휘경묘갈명(贈童蒙敎官朝奉大夫竹軒公諱徑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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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정공>약포공휘일묘표(藥圃公諱佾墓表)
藥圃公諱佾墓表 士有志行醇篤而不遇以沒其世者故藥圃趙公佾字伯雍是也公玉川人胄于高麗大將軍諱璋簪組相襲至諱瑜典農副正入本朝全罔僕之節累傳至梅窓諱大成進士諱怡兩世俱爲士友推重進士公擧男有曰㫾生諱時諧時休時休出爲仲父諱曄后生諱有儉與其配聞慶宋氏暹之女並以孝烈旌閭又無嗣子時諧之孫即公而諱有呂及洪陽李氏煒女其所生考妣也公性於孝左右就養深得父母歡心常曰爲人子當竭誠於養生盡禮於送死前後喪哀毀逾制晨必拜廟每忌日致齊靜室不接外人事叔父待親黨敬謹篤摯營紀喪葬視其孤如己子撫養敎誡咸得其宜朋友亦多爲重也 肅宗己巳仁顯閔氏遜位士禍大作公仰屋長吁至廢寝食語及丙子南漢之事不勝悲憤聞上侯違豫不安在家出寓山寺作詩以見志盖公群行如是卓然非徒天賦爲然也其得於學問之力爲多公博習經傳貴踐履而不務詞章嘗以爲十分義理雜了一分人慾便是自欺也往謁寒水齋權先生先生亟稱爲南州高士有欲知公者盍於斯徵焉哉雖然未得以一命施其所學士之生乎叔世誠亦可慨也己庚子十月二十四日吿終其生壬辰爲六十九配文化柳氏生員煒之女生二男永命祺命出后曰進士安坫張繼重李後商其三女婿也繼配咸豊李氏進士雲驥之女生一男奎命亦出后曰邊海翼呉德漢其二女婿也長房男瑾過房男瓛珍瓛五代孫永學從余游乞公墓文余靡足以不朽人者然竊感公至行不辭而爲之書表陰曰帶方治北梅岸洞負庚原是隱德攸藏也後之過者其可式焉 恩津 宋秉璿 撰 약포공휘일묘표(藥圃公諱佾墓表) 순독(醇篤)한 지행(志行)이 있는 선비로 세상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조용히 묻힌 자는 고(故) 약포(藥圃) 조공(趙公) 휘(諱) 일(佾), 자 백옹(伯雍)이다. 공은 옥천인인데 부정(副正)공 휘 유(瑜)의 후예로 고조는 진사연담공휘이(進士蓮潭公 諱怡)요, 증조는 휘 엽(曄)이며 조의 휘는 시후(時休)이고 고(考)의 휘는 유검(有儉)이요, 비는 문경송씨(聞慶宋氏) 섬(暹)의 따님인데 효열(孝烈)로써 함께 정려(旌閭)하였다. 공은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언제나 부모를 봉양할 때문 부모의 깊은 사랑을 얻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마땅히 생전 봉양에 지성을 다할 것이며 사후 영결에 예제를 다해야 한다.』 하였다. 전후의 부모 상에 애통망극(哀痛罔極)하고 새벽에 반드시 사당에 참알하였으며 제사날에는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고요한 방에 앉아 외인을 대하지 아니하였다. 숙부 모시기를 친부모같이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상장(喪葬)을 영기(營紀)하였으며 고아된 조카들을 내 자식같이 여겨 세심한 주의를 기울려 모두 다 바른 길을 걷게 하니 향방이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숙종 기사년(一六八九)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廢位)되고 사화가 크게 일어나니 공이 천정을 우러러보며 길이 탄식하고 침식을 폐하였으며, 병자(丙子)년 남한산성의 일에 말이 미치면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주상의 병환이 침중하단 소문을 듣고 집에 있기가 불안하여 산사(山寺)에 들어가 시를 지어 지절(至節)을 뵈이니 대개 공의 모든 행실이 이와 같이 고결(高潔)한 것은 하늘이 주신 성정일 뿐아니라 그의 학문에서 얻은 힘이 많다 하겠다. 공이 널리 경전을 공부하여 조행이 독실하고 사장(詞章)을 힘쓰지 아니하며, 일찌기 十분의 의리에 一분의 인욕(人慾)이 섞이면 이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 하였다. 공이 한수재 권선생(寒水齋權先生)을 배알하매 선생이 남주고사(南州高士)라 칭찬하였으니 공을 알고자 한자가 있으면 어찌 여기에서 증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배운 바를 베풀도록 명령을 한번도 받지 못하였으니 선비가 말세에 때를 잘 못만난 것이 또 진실로 슬플 따름이다. 경자(庚子)년 十월 二十四일에 향년 六十九세로 별세하였다. 배 문화유씨는 생원 위(煒)의 따님이요, 남(男)은 영명(永命), 기명(祺命)인데 기명(祺命)은 출계하고, 딸은 진사 안점(安坫) 장계중(張繼重), 이후상(李後商)의 처이다. 계배 함풍이씨(咸豊李氏)는 진사(進士) 운기(雲驥)의 따님인데 남(男) 규명(奎命)은 출계하고 녀(女)는 변해익(邊海翼), 오덕한(呉德漢)의 처이다. 장방(長房) 남은 근(瑾)이요, 과방(過房) 남은 헌(瓛), 진(珍)이다. 헌의 五대손 영학(永學)이 나를 종유하며 공의 묘문(墓文)을 청하니 내가 족히 불후(不朽)한 사람은 아니나 공의 지극한 행의에 감동하여 사양치 아니하고 이 표를 쓰노라. 다음과 같이 표한다. 대방현북(帶方治北) 매안동부경원(梅岸洞負庚原)은 이 은덕군자(隱德君子)의 유택이니 지내는 후인은 그 가히 효모(傚慕)하리로다. 恩津 宋秉璿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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